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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5(연산1)∼1534(중종29)
字는 공하(公瑕), 충렬공의 10대손이다. 을묘년(1495) 10월 11일에 출생하였다. 中宗朝 1519년(중중 14) 進士에 급제하고(權璉 榜下) 정암 趙光租의 門人으로 學文이 높았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기묘사화(1519. 중종 14)로 은사인 조정암이 화를 당하자 서울 남산 아래인 주자동(지금의 회현동 극동빌딩 자리)에서 충북 槐山郡 文光面 문법리(文法里)로 일시 은둔불사 하였다가 외가인 의성김씨들이 많이 살고 있는 典法里로 옮겨 은거 하였다. 이곳은 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공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소지명을 금석골이라 한다. 1534년 4월 11일 수 40세로 몰하였는데 그 후 1581(선조14)년에 자 悌甲의 推恩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 자좌에 묘소가 있으며 1575년 長子 忠甲이 撰하고, 四子 悌甲이 書한 墓碑가 있다. 장남 忠甲은 晋州牧使인 時敏의 아버지이고, 4남 悌甲은 原州牧使로 壬辰亂때 순절하였다.
<2006. 4. 5. 신 조성묘소> (2005. 4. 22. 항용(제) 촬영 제공)
<묘소 전경>
<묘역 석물 제원>
<제 2단 묘역 우측(휘 효갑 묘소 우측)에 있는 영상공 묘비 중건비>
<신조성 이전의 묘소 사진> (2004. 9. 항용(제) 촬영 제공) <묘소> (영상공 위는 모친이신 의성김씨의 묘소임)
<묘비 및 상석>
<구 묘비>(1575(선조8) 건립. 크기: 54×14.5×137)
<신 묘비>(1967년 건립. 14대손 撤應 書>
<신 묘비의 좌, 후, 우측>
<2005. 4. 24. 묘역 우측에 부러져 있던 망주석 보수 상태>
<묘역 우측>
<묘역 좌측>
<묘역 우측의 중수기비 전면>
<상기 중수기의 상단부분>
<중수기 전면 상단> <중수기 우측면>
<중수기 후면>
<영상공께서 괴산 은둔 직전 거주지-주자소 근처- 탐방> (안사연 현지 답사) 1)일시 : 2003. 8. 17. 2)장소 : 서울시 중구 충무로3가 60-1 중부세무서 앞 극동빌딩 앞 3)답사자(무순) : 상석(제), 윤만(문), 주회(안), 태서(익), 항용(제), 윤식(문)
<안동김씨 삼강록 권 2의 기록 내용>
<영상공 괴산 낙향지 전법리(금석골) 탐방기> (2005. 8. 1. 항용(제) 제공) 7월 25일, 아침 일찍 괴산 세덕사 정리를 마치자마자 상석대부님과 함께 괴산군 문광면 문법리로 갔다. 어제 저녁에 규문아저씨에게서 들은 영상공의 실거주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지난 봄, 서울에서 전화상으로 이곳 이장님들에게 열심히 물어도 아는 이가 없었던 일이다.
불과 5분 만에 도착한 문법3리 입구에는 좌측산 능선이 끝부분으로부터 편안한 선을 그리며 살짝 가라앉듯 동쪽으로 길게 이어진 숲이 보인다. 450여 년 전 영상공의 주창으로 세워진 일명 문법숲이다. 문법리에 사시면서 이 마을의 지세를 세밀히 살핀 공께서 남쪽이 허한 것을 발견하고는 이곳에 높은 둑을 세우든가 숲을 조성하여 멀리 대로가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하며 조성하신 숲이라 전해온다.
<마을 입구에서 바라 본 문법 숲>
<문법숲 아래-느티나무, 참나무가 주종이며 정자가 있고 마을의 시원한 쉼터이다>
<매년 정월 보름날, 문법숲 이 나무 아래에 제수를 놓고 동제를 지낸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 다시 문법숲으로 들어가니 작은 정자 하나가 보인다. 노인 두 분께서 쉬고 계신다. 정자에 올라 절을 하고 나의 성과 본관과 이름을 밝히니 한 노인분께서 “나도 안동인디, 호(浩-默과 동항렬)자 돌림이여, 워디서 왔어?” 이때부터 대화는 급진전하며 이 지역과 문중 역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신 일가 대부님으로부터 여러 의문점들은 시원하게 해결되어 갔다. 천만 대행이었다.
<문법숲 정자위에서의 대담과 인호대부님>
대부님은 제학공파 오갑 자손 중 참봉공(휘 友甲) 후손으로 2자이신 휘 시상(時尙)의 후손이셨다. (時尙-大乾-鼎壽-允泰-光昊-瑞麟-圭璞-重健-亨源-慶年-仁浩) 몇가지 중요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다. 1. 자신은 현재 이곳에 10여 대를 살아왔다. 현재 문법 3리 184번지에 살고 있으며, 1929년 생으로 77세이다. (전화:043-833-0388) 2. 이곳 문법리 일대에는 예부터 우리 안동김씨들이 많이 살아 왔다. 그 중 제학공파 참봉공 후손들과 안렴사공파들이 주류를 이룬다. 3. 현재는 종친들이 많이 떠나 몇 집이 남아 있을 뿐이다. 문법1리에 2집(태욱, 명응), 문법2리(전법리, 금석골)에 1집(태일), 문법3리에 2집(인호 등)이 있을 뿐이다.
<문법3리 전경> (중앙의 붉은색 지붕이 인호대부님 댁)
4. 이곳에 우리 집안이 대대로 살아 왔다는 증거로는 문법 3리를 둘러싸고 있는 산이 득영씨(참봉공파, 전 단양부군수 역임. 卒)와 태헌씨(참봉공파) 종산이며, 주위 산에는 10여 대를 넘는 선대 묘소가 곳곳에 있다.
5. 영상공의 모친이신 의성김씨 할머니의 고향이요, 이곳에 정착하게 된 원인이 되었던 영상공의 외가인 의성김씨 집성촌은 이곳으로부터 청천쪽으로 조금 더 가서 있는 옆 마을인 양곡리이다.
6. 문법숲을 조성한 것은 약 500여 년 전부터 영상공의 주창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후 계속해서 식목을 해 왔으며 주 수종은 느티나무와 참나무이다. 일부에서는 경주김씨가 먼저 조성하기 시작했다가 후에 영상공께서 이어서 이 사업을 지속했다고 전하는 말이 있다고 하나 이는 잘못이다. 일찍이 이곳에 경주김씨가 살았던 적이 없다. 주변 산에 경주김씨 묘는 없고 온통 우리 안동김씨 묘만 있다는 것은 이 말의 와전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이다.
7. 이문거리표(里門距離表) 표석은 마을 입구라는 의미로 500여 년전 영상공께서 세우신 것인데 글씨는 없는 것 같다. 원래는 현 위치(문법숲 입구에 설치)가 아니라 문법 3리 마을(문법숲 상단 위쪽) 좌측 끝 가옥에서 약 50m 좌측의 논 가운데 있었다. 그런데 오래 전에 한 사람이 이 돌을 자기네 논의 물고 위에 작은 다리 용도로 썼다. 그 후 그는 갑자기 몸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이에 이를 다시 원 자리에 세우니 신기하게도 아프던 몸이 나았다. 약 30년 전에 김천응종친(참봉공 후손)이 이를 현 위치인 문법숲 아래로 옮겨 세운 것이다.
<이문거리표 최초위치 : 상기 사진 우측의 전봇대에서 좌측으로 50m지점>
<문법숲 입구의 이문거리표>
<이문거리표 표석-중앙에 글씨가 있는 듯하나 판독이 불가능함>
8. 영상공이 살았던 곳이라 하는 김석골(필자 주 : 김석은 영상공의 휘(김석)를 딴 마을이름으로 현지인들은 짐석골이라 하나 이는 김석골의 구개음화된 사투리적 용어이다)은 문광면 문법2리를 일컫는 말인데 문법1리 마을 회관에서 서편 산쪽으로 올라가 전봇대가 있는 곳이다. 현재 약 7가구 정도가 살고 있으며, 영상공 집터에는 현재 김태욱종친(안렴사공파, 30년 전 괴산지역 국회의원 출마 경력, 부는 정회)이 살고 있다.
약 1시간여에 걸쳐 많은 말씀을 나누고 난 뒤 인사를 드리고 우리는 문법2리(일명 전법리)의 김석골로 향했다. 문법1리 마을회관 옆에서 아주머니들에게 김석골과 김태욱 집을 물으니 마을회관에서 거의 이어진 상태의 뒤쪽(서편) 마을로 산 아래 높은 곳에 있는 통나무집이라 일러 준다.
<김석골(문법2리-전법리) 원경, 좌측 산쪽의 긴 건물(교회)부터 우측마을이 김석골>
<김석골 근경, 중앙의 산 아래 조금 뾰족한 것이 영상공 집터이다>
현지에 이르니 우리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 통나무집은 근처 시골집 등에서 보기 어려운 최근에 멋지게 진 별장이었다. 마을 뒷산 주능선 끝 부분 아래의 널찍한 터(약 200여 평)에 곱게 깔린 잔디와 아담하게 지어진 현대식 2층 통나무집(단층 면적 약 40여 평)과 부속 건물(약 30여 평)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는 그 멋스럽고 아담한 모습을 보고 부러움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바로 밑 집의 대문 기둥에는 김태일이란 문패가 걸려 있었다. 틀림없이 우리 일가일 것이다. 그런데 인기척이 없는 것으로 보아 들에 일을 나간 모양이다.
<영상공 집터와 지덕규씨 통나무집>
<통나무집 옆의 부속건물>
잠시 생각에 잠긴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 년 전(1519년), 영상공께서 서울 주자소 근처(현 퇴계로의 극동빌딩 윤주한의원 근처)에서 기묘사화를 당하자 화를 피해 이곳으로 오시어 이 집터에서 삶을 시작하셨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성균진사로서 정암 조광조선생과 더불어 당시 낡은 정치 사회제도를 개혁하려 했던 25세의 젊은 선비, 그 큰 꿈과 희망을 접고 괴산의 깊은 산골에서 은거해야만 했던 그 심정과 절망감은 어떠했을까? 이곳에서 5 아들(五甲)을 교육시킬 때의 모습은 또한 어떤 심정과 모습이었을까? 어디쯤에선가 다섯 아들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집의 이곳저곳을 감상하고 있는데 좀 있으려니 2칸 아랫집에서 한 아주머니가 나오시며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다. 대충 우리의 방문 목적을 말씀 드리고 이 집터에 대해 물으니 다음과 같이 답해 주신다.
1. 이 집은 괴산군 문광면 문법2리(전법리) 631번지로 현재 지덕규씨 소유의 집이다. 마을 좌측에 있는 교회로부터 그 우측선과 뒤쪽으로 있는 약 7가구가의 동네가 금석골이다. 2. 지덕규씨는 서울에서 00건설회사에 근무하고 있는데 이 집은 그 분이 별장처럼 사용하고 있고 얼마 후 퇴직하면 이곳에 와서 살 계획이다. 3. 자신은 바로 그 지덕규씨의 형수로서 이름은 이춘자(66세)이며 부군은 지홍규인데 별세하였고 전화는 043)832-4876이다. 4. 자신은 약 45년 전인 1960년경에 이 마을로 시집와서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시집 올 당시 이 집은 초가집이었다. 5. 한 때 이 집에 살았고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도 했던 김태욱씨는 약 30년 전에 청주로 이사를 갔다. 그 당시에도 이 집터의 주인은 다른 사람이었고 김태욱씨는 다만 집을 짓고 살았을 뿐이다. 그 후 이 집을 포함한 이 지역 일대의 토지가 경매에 붙여지자 시동생인 지덕규씨가 이 집을 낙찰 받아 인수하게 되었다. 현재 자신은 2칸 아랫집에 살면서 이 집을 돌보고 있다.
친절하게 대답해 주셨다. 대문 안에 들어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집안 이곳저곳을 살폈다. 마을이 한 눈 아래로 들어 왔고 마을 앞 동남쪽으로는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었고, 높고 낮은 건넛산이 훤하게 내다보였다. 마을에서는 전망이 가장 좋은 명당 터였다. 집 앞 잔디밭에는 수 백 년 되었다는 자두나무가 있었고 집 뒤로는 오래된 오동나무가 있어 집터의 역사를 대충 말해 주고 있었다. 내 별장이 이것이라면 하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몇 번을 되돌아보며 집을 나왔다.
<집 앞의 자두나무, 오래된 것으로 고목은 자르고 새 가지가 나왔다>
<집 뒤의 오동나무>
다시 문법3리 문법숲으로 되돌아 갔다. 이문거리표석을 촬영하기 위해서다. 아직도 정자 위에 앉아 계신 인호대부님과 몇 분들이 멀리서 우리들의 모습을 살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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